도명산 (괴산)
도명산- 낙영산 산행후기
날 짜 : 2011. 9. 3(토) 작성자 운해
구 간 : 공림사 ▶ 미륵산성 ▶ 낙영산 ▶ 도명산(정상) ▶ 마애불 ▶ 학소대 ▶ 화양동 ▶ 주차장
시간내별 진행
07:30 출발지점 출발
11:30 공림사 주차장
11:35 산행시작(공림사 경내)
11:45 산행출발(공림사 입구에서 좌측)
12:17 주능선 도착(5분간휴식/후미도착 확인)
12:35 낙영산 정상
12:45 명품소나무
12:50 토기바위 도착(점심식사/40분)
13:30 출발
14:10 도명산 안부
14:30 도명산 정상(18분)
14:48 정상 출발
14:55 마애삼존불상(10분)
15:35 학소대
15:50 너럭바위(15분간 휴식)
16:20 암서재/우암 송시열 유적지
16:33 운영담
16:50 하산완료
17:40 버스 출발
산헹지 소개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도명산은 총 길이 6㎞에 달하는 화양구곡의 시원한 절경을 끼고 있어 여름철 계곡 산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여 있으며 그 중에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9부 능선 정도에 옛날에 낙양사가 있었다던 낙양사터에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 경승지로 손꼽힌다.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최고 30m나 되는 수직암벽에 각각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북쪽 아래로는 화양동 계곡과 군자산, 칠보산이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대하산, 남쪽으로는 낙영산, 주봉산, 멀리 속리산 능선과 문장대가 들어온다. 주변에는 분재처럼 자란 소나무가 정취를 더한다.
화양동계곡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경이 아홉 곳이나 된다고 해서 '화양구곡'(華陽九曲) 또는 '화양동 소금강'으로 불린다. 이곳은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조선조 대유학자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나와 은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암 선생은 이곳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닮았다 하여 스스로 제1곡부터 9곡까지 이름을 붙이고 경천벽, 금사담, 첨성대 등의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화양구곡은 제1곡인 경천벽에서 제9곡인 파천까지 화양천변 10여리길에 암석과 암반이 펼쳐져 있다. 제1곡은 경천벽. 층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 이름지어졌고 화양2교 옆에 나타나는 제2곡은 운영담이라 불린다.
이름 그대로 구름이 물에 비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제3곡은 우암 선생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통곡했다는 읍궁암이 있고, 화양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금사담( 제4 곡)은 이름처럼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깔려있는 곳으로 넓은 암반 위에 우암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정자(암서제)가 노송 사이에 있다. 화양3교 직전 오른쪽 낙영산 꼭대기에 있는 기괴한 암벽인 제5곡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1백m쯤 더 올라가면 계곡이 더욱 깊어지면서 2층으로 된 큰바위인 제6곡 능운대가 나온다. 이후로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이 파천이다.
에필로그
9월은 뜨거웠던 여름이 막바지를 지나 가을로 넘어가는 달이다.
계절산행을 구분하다보면 가장 어중간한 틈새계절이 구월이다,
계곡에서 시원한 알탕이 있는 여름과 아름다운 단풍 떠올리는 가을 사이에서 이도저도 아닌 계절~~
이럴때 가장 어울리는 산행은 뭐니뭐니해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릉과 아름다운 절경을 가진 계곡으로 하산하는 것,,,
능선에서 기암과 노송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머물고 싶은 아름다운 절경에서 여유를 부리는 산행~
그래서 이번 산행은 이런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도명산으로 정하였다.
애당초 가령산까지 모두 욕심을 부려봤지만, 절경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도록 코스를 줄여서 진행하였다.
산행사진
▲ 공림사 경내의 모습/공림사는 신라 경문왕이 자정선사의 법력에 감동하여 국명에 의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65년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고,
1981년부터 13년간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 고개마루를 넘어가는 솔바람이 너무너무시원하다.~후미 도착할때까지 휴식
▲ 낙영산 정상 도착
▲ 낙영산을 지나서 기암과 노송들~
▲ 속리산을 포함한 충북알프스~~문장대, 관음봉, 묘봉, 상학봉~~
▲ 미륵산성 돌성벽위를 따라서
▲ 누가 이렇게도 많은 받침목을 세웠을까?~~바위는 전혀 걱정없건만 사람 마음이
▲ 도명산 정상에서
▲ 올랐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와 정상에서 약 10분 거리에 마애삼존불이 기다리고 있다.
▲ 마치 깍아세우기라도 한듯 반듯한 바위에 상부에 비바람을 막아줄 처마마냥 튀어나온 바위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큰 바위 오른쪽에 새겨진 불상은 그중에 가장 세련되게 새겨진 불상으로 약9.1m규모에 얼굴만 2m라고 한다.
두번째 불상은 더커서 길이가 14m에 이르고, 세번째 불상은 옆의 작은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돋을 새김기법을 사용하였다.
▲ 학소대에서,,,
바위위에 푸른학이 알을 품었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었다고 한다.
▲ 금사담위의 암서재
▲ 운영담~~
“조선사회를 움직인 유학자 송시열”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여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송시열은 자신을 신임했던 효종에게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을 주장해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오랑캐인 청을 응징하고자 했다. ‘주자(朱子)제일주의자’였던 그의 이념은 당시 유림을 이끌던 신념이 되었다. 효종 사후 송시열은 정쟁에 휘말려 사사(賜死)되었으나 유교의 성현들만을 모신 문묘에 배향되었고, 전국의 서원에서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사후에도 조선사회를 움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세설명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 등 글자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일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한때는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곳이다. 민족 정기회복을 위한 교육 장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인터넷 발췌 : 다음문화유산